밀양 용서… 온전히 받아들이기 힘든 두 글자

권상희 영화 칼럼니스트 / 기사승인 : 2013-09-23 12: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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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죽도록 증오한적이 있는가?

만약 있다면 그 증오를 누그러뜨리고 온전히 용서한 적이 있는가?
어느순간 갑자기 옛일들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불쑥 수면위로 떠오를때가 있다.
생각해보면 그 파편들은 머리로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닌, 바로 내 가슴이 기억하고 있는 것들이다.
용서라는 이름으로 심연 깊숙한 곳에 밀어버렸는데도…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의지로는 어찌할 수 없이 부지불식간에 떠오르는 것들…그것들은 의지만으로는 견뎌내기 힘든 무게로 내게 다가오곤 한다. 다 잊었다고 믿었는데 기억되는 순간의 고통은 시간의 힘으로도 결코 해결되지 않는 것임을 깨닫게 해준다.

영화 <밀양>은 아픈 상처가 용서로, 그것이 다시 고통이라는 이름으로 변하여 그 속에서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인간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 밀양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사고로 죽은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내려온 신애 (전도연 분)와 그녀의 아들 준. 밀양으로 오는 길이 낯설기만 한 신애는 종찬 (송강호 분)에게 길을 물어보게 되고 그들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된다. 종찬의 친절이 불편하기만 한 그녀는 애써 그를 밀어내지만 사람 좋은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진심을 보여주기 위해 늘 그녀 곁을 서성인다.
아들 준과 새로운 둥지를 만들고 소소한 일상을 보내던 그녀. 하지만 평범한 행복은 오래지 않아 산산조각 나고 만다. 아들 준의 유괴와 살해…
이는 바로 준이 다니던 웅변학원 원장, 박도섭의 소행이었던 것이다.
아들을 가슴에 묻은 신애는 마치 자신의 폐부가 갈갈이 찢겨진 것 처럼 아프고 또 아프다.
경험하지 못한 자의 위로는 그저 사치일 수 밖에 없으리라. 그래서 종찬 역시 아무 말 없이 그녀 곁에 있을 뿐이다.
미치도록 흐느껴 우는 그녀의 뒷모습에서 끔찍한 고통의 시간들을 어찌 할 수 없어 몸부림치는 처절함마저 느껴진다.

아들을 묻은 아픈 가슴으로 찾은 교회의 부흥회.
신앙의 힘으로 새 삶을 살기 시작한 신애는 급기야 아들 준을 죽인 박도섭을 용서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를 면회하고자 교도소를 찾은 신애의 평온함은 오래지 않아 깨져버린다.
회개한 후 하나님께 용서받았다는 평온한 얼굴의 박도섭.
일순간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 아들과 함께 묻었을 상처의 시간들이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이미 용서를 받았는데 내가 어떻게 용서할 수 있어요? 내가 그 인간을 용서하기 전에 어떻게 하나님이 먼저 그를 용서할 수 있어요? 난 이렇게 괴로운데 그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 받고, 구원 받았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왜? 왜?”
용서와 믿음을 버린 신애에게 남은 것은 이제 신을 믿기 이전보다 더 큰 고통일 뿐이다.
방향을 잃은 그녀는 통제의 힘까지 상실해버렸다.

신에게 대항하기라도 하듯 마치 정신 나간 사람처럼 기이한 일들을 저지르는 그녀를 지켜보는 건 곁에 있는 종찬도, 어느 순간 그 아픔과 고통에 동조하고 있는 나 자신도 괴로운 일일 수 밖에 없다.
어서 멈춰주기를... 힘겹겠지만 다시 살아내기를 바라는 건 그녀에게 지나친 욕심일까?
끝없이 확장되고 있는 고통의 시간들.
신을 향해 손목을 그어버리는, 마치 이 보다 더 큰 복수는 없다는 듯 위를 올려다 보는 그녀의 살기 어린 눈빛. 고통으로 점철되어버린 그녀의 삶을 어떻게 되돌릴 수 있을까?
삶을 놓아버린 순간, 고통을 놓아버리는 것이라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삶은 그리 쉽게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리라.
변함없이 신애의 곁에 있는 종찬. 그녀 혼자가 아닐 수 있음에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온다.
삶은 그렇게 또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고통의 무게가 아주 조금은 줄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갖고…

영화는 기울어진 햇빛에 잘려나간 신애의 머리카락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으로 끝난다. 비밀스런 햇볕이란 영화 <밀양>의 뜻처럼 마치 그 장면은 신애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비밀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양 느껴진다.
스스로 머리를 자른 그녀가 고통의 시간까지 함께 잘라버렸기를, 또한 새롭게 시작될 삶에 대한 소망을 가졌기를 바랄 뿐이다.
그녀가 저주했던 신까지 용서하기를 바란다면… 방관자의 무책임한 실언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건 시간이 해결해주어야 할 일이겠지?

신과 인간, 용서와 고통- 누군가는 이 영화의 주제를 “철학적” 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그렇게 어렵지도, 멀리에 있지도 않다. 그저 삶과 맞닿아 있을 뿐이다.
고통… 그 두 글자는 피하고 싶지만 마치 그것이 미리 정해져 있기라도 하는 듯 어쩌지 못하고 고스란히 온몸과 마음으로 받아내야만 할 때가 있다.
용서… 그 두 글자는 온전히 받아들이기 힘든 무게로 찾아와 때로 내게 강요할 때가 있다.
어서 용서하라고…어서…… 그게 지금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어떻게 하는 것이 정답일까???
살아가야 하는 게 인생이기도 하지만, 살아내야 하는 게 인생이기도, 우리 삶의 모습이기도 하다.
잘 살아가려면, 잘 살아내려면… 마음의 무거운 짐덩어리를 벗어버리는 편이 낫지 않을까?
물론 고통스러운 순간도, 누군가를 용서해야만 했던 순간도 있었기에 그것이 어떤 일보다 어렵다는 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고통에서 벗어나 용서에 이르는 건 증오하는 그 대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해야만, 해내야만 할 일이리라.
가끔 치밀어 올랐던 고통의 기억들을 온전히 지워버리는 일을 다시금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신애가 스스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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