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트로트' 박동수, 멈출수 없는 가수 꿈

남우주 / 기사승인 : 2014-07-30 13:5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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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트로트 지망생' 천하무적 박동수가 지난 28일 그레이트와의 경기 중 덕아웃 앞에서 타격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20년 트로트 지망생' 천하무적 박동수가 지난 28일 그레이트와의 경기 중 덕아웃 앞에서 타격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빙상 유망주에서 잘 나가는 아이스하키 선수로, 다시 공연 기획 이벤트회사 직원에서 아이스 ·인라인하키클럽 감독까지. 거기에 더해 엄청난 교통사고. 참 쉽지않은 인생 고비를 넘겨왔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길에 도전한다. 이번엔 요리를 통한 주점 운영을 꿈꾼다. 운명처럼 희망하는 한 가지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파란의 삶 주인공은 박동수. 연예인 야구단 천하무적 총무로 활동한다. 1973년 생이니 마흔 둘. 단 하나의 목표는 트로트가수. 그는 말한다 "트로트 가수가 되기 위해 이렇게 힘든 우여곡절을 겪었나 보다"고.

천하무적 야구선수 박동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스케이트를 만났다.과일가게를 하는 아버지 손에 끌려 영문도 모른채 스케이트화를 신었다. 빙상 종목은 가난해선 하기 어려운 운동. 부모님 장사는 그 정도 뒷바라지는 견딜만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어린 박동수는 수색 등지의 매섭게 추운 빙상장이 싫었다. 그렇지만 성적은 괜찮아서 메달도 따고 단체전 우승도 했다.

그가 중학교 3학년이던 1989년 얼음판 위엔 새로운 변화가 휘몰아 쳤다. 국제대회의좋은 성적을 바탕으로 국내에도 쇼트트랙 바람이 게세게 불었다. 같은 학교 동료 선수들도 대부분 쇼트트랙으로 전향했다. 그도평생 처음 자신이 걸어야 할 길을 결정해야 했다. 그는 유행을 따르지 않았다. 쇼트트랙이 아닌 더 힘든 아이스하키를 선택했다.

무던한 성격의 그는 자신의 선택을 믿었고 그 길을 따랐다. 아이스하키 국가대표 상비군까지 올랐다. 그러나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서 변수가 생겼다. 집안사정이 어려워졌기 때문. 스틱을 놓아야 할 지를 고민했다. 동기 7명 중부잣집친구 2명만 체육특기생으로 대학에 진학했다.당시엔 특기생이 되려면 상당한 무엇이 필요했던 시절이었다.

그는 인천의체육전문대학에 진학했다. 하지만 형편상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되자 입학 후 바로 군대를 생각했다. 꼬인 생활에 대한반항과 체념으로, 빨리 돈을 벌어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스무살 청년이 결정한 '눈물겨운 입대'였다.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스물두살 겨울에 제대했다. 복학 보다 취직이 먼저였다. 공연기획을 하는 이벤트회사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즈음 언제부터인가 가슴 속에 '하고 싶은 무엇 하나'가 자리를 틀었다. 공연기획 일을 5년 동안 했다. 연예인들과 친분도 쌓고 친구도 생겼다. 그런데 그들과 함께 열광했던 밤문화가 조금씩 시들해졌다. 대신 오디션장을 찾기 시작했다.

"오디션을 정말 많이 봤어요. 10번도 훨씬 넘게 봤어요" 그가 말했다. 10번이 많은 것이냐고 묻자 "그 때는 트로트가 뽕짝이라고 천대받았어요. 그래서 오디션 보는 곳도 별로 없었어요. 10번은 많은 거예요" 라고 한다. 왜 하필 트로트였냐고 되묻자 "김광한 이재민 등 선생님들이 '너 목소리는가성이니까 트로트를 하라'고 해서 그랬다"며 백치웃음을 보였다. "그러다 보니 트로트가 정말 좋아졌어요. 연기에도 도전했었어요" 묻지 않았는데 덧붙인다. "MTM(당시 서울 여의도의 연기학원) 8기 였어요"

박동수는 2001~2002년 아이스-인라인하키 클럽팀을 맡아 지도자 생활을 했다. 팀을 수 차례 우승시키며 최우수지도자상도 수상했다. 박동수는 2001~2002년 아이스-인라인하키 클럽팀을 맡아 지도자 생활을 했다. 팀을 수 차례 우승시키며 최우수지도자상도 수상했다.


20대 후반의 청춘을 그렇게 보내던 중 별안간 이벤트사가 문을 닫았다. 다시 한 번 터닝 포인트를 맞았고 기로에 섰다. 옛 친구들의 소개로 스케이트장 빙상코치로 다시 얼음판으로 돌아왔다. 2001년엔 아이스·인라인하키클럽팀 '이스틱하키팀'을 창단해 '펭귄스팀'까지 유소년과 성인들을 지도했다. 전국대회 우승을 여러 차례 일구며 최우수 지도자상도 수상했다. 2001~2002년엔 인라인하키 국가대표 감독을 지내며 보람을 찾았다. 가슴 속 '하고 싶은 무엇 하나'는 그대로 간직한 채."그런대로 살 만큼 돈벌이가 됐지요. 2012년 겨울 교통사고 전까지는요"

그는 2012년 겨울엔 스키강습을 했다. 스키지도자들과 저녁 식사 후 강원도 횡성 둔내에서 차가 빙판에 미끄러지며 건너편 가로등을 들이 받았다. 무릎에서 허리까지 골절. 에어백이 없었다면 생사가 어떻게 됐을지 모를 정도의 중상. 3시간이나 걸려 원주의 병원으로 이송. 전치 14주 입원생활. 풀릴 만하면 다시 꼬이는불운의 되풀이.

얼음과 관련된 모든 것을 정리했다. 빙상 지도자 생할을 더 이상 할 수없는 몸상태로는 어떤 것도 무리였다. 빙상 학원도 클럽도 모두 접었다. 다음 해 결국 어머니에게로 돌아왔다. 병원과 식당 등에 납품하는 과일가게 일을 도우며 요리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가슴 속에 키운 '하고 싶은 무엇 하나'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우선 생계를 해결하고 '무엇 하나'를 하기 위한 준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는 요즘도 음악하는 친구들에게 곡 하나 달라는 부탁을 한다고 했다. 그 것도 꼭 트로트로. 그러나 곡을 주는 친구는 없다고 했다. 이유를 묻자 "그들 눈에는 아직 내가 노래 부르는 것이 영~"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그는 집에 준비된 악기로 혼자 노래를 부른다. 언젠간 꼭 트로트 음반을 내겠다는 일념으로. 그리고 그 일을 집에서 돕는 사람이 한 명 있다.

2010년 친한 여동생으로 만나 2년 만에 부부가 된 박동수와 그의 아내. 기타 연주가 가능한 아내는 박동수의 최고 지원군이다. 아내의 기타 반주에 맞춰 박동수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 2010년 친한 여동생으로 만나 2년 만에 부부가 된 박동수와 그의 아내. 기타 연주가 가능한 아내는 박동수의 최고 지원군이다. 아내의 기타 반주에 맞춰 박동수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는사고 나기 4개월 전인 2012년여름쯤 결혼을했다. 그를 도와주고 격려하는 이는 그의 아내다. 2010년 한 식당서 식사하다 한 눈에 반했던 친한 여동생이 2년을 지나며 자기에서 여보가 됐다. 아내가 된 이는 평범한 회사원이었고 키 171㎝의미인이라고 팔불출처럼 그가 자랑했다. 그리고 18개월 전엔 딸까지 선물해 주었다고.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는 건 확실히 맞는 말이란 걸 그를 통해 실감할 수 있다.

그런 몸으로 야구를 해도 되는지 걱정하자 "트로트 처럼 야구도 놓을 수 없지요"한다. 그의 야구 경력은 화려(?)했다. 10년도 넘는 세월 '도깨비'라는팀에서시작해 '히어로즈'로 다시 '만신창이'로 야구를 해왔다. TV 예능 '천하무적'이 생기자 만신창이의 주축이 천하무적에 입단했다. 그리고 TV '천하무적'이 폐지되면서 연예인 천하무적으로 한 팀이 됐다.

천하무적 박동수가 28일 그레이트전에서 3루 수비를 하고 있다. 천하무적 박동수가 28일 그레이트전에서 3루 수비를 하고 있다.


"천하무적으로 끝까지 갈 겁니다. 어느 팀도 우리의 우정과 의리를 따라 오지 못합니다. 올 목표는 다치지 않고 즐겁게 야구하는 것이고요 형들과 동생 오래오래 보는 것이예요" 김창렬과 김동희 등이 그와 야구 인생을 함께 하는 절친이다.

그는 오늘도 야구 스케줄이 없으면 낮엔 어머니 일을 돕고 저녁엔 집에서 딸을 보며 아내와요리를 한다. "오빠 하고 싶은 것 다 하라"고 밀어주는 아내를 위해 하루 빨리 주점을 열어 생계를 해결하고 자신의 '하고 싶은 무엇 하나'를 이루기 위해서다.

20년 트로트 지망생인 그는 마지막으로 "주점을 열면 야구하는 형.동생들 자주 만나고, 돈을 벌면 음반내서 모두 이루는 거죠. 트로트가수 야구선수 박동수 기다려 주세요"라고 인사를 맺었다. 순박하고 긍정적인 그러나 다소 고지식한 그의 성격이 파란만장의 인생 길을잘 헤쳐나오게 했겠다는생각이 들었다. 박동수의 간절한 '무엇 하나'가 아내와 딸의 응원 속에하루 빨리 이뤄져 그 주점에서 그의 트로트 열창을 듣게 되는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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