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서 '신의 한 수'를 경험한 적이 있는가?
행운이란 단어만으로는 설명이 충분하지 않은, 거대한 그 무엇...신의 한 수는 말 그대로 인간의 힘을 뛰어넘은 것이기에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무수히 많은 언어만으로는 제대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
“거액의 로또 당첨, 그 후로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이 정도라면 '신의 한 수'쯤 될까? 하지만 인생 한 방은 '신의 한 수'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과연 '신의 한 수'는 무엇일까?
영화는 오프닝 시퀀스에서부터 '복수'를 화두로 내세운다.
살수(이범수)팀의 음모로 내기 바둑판에서 무참히 살해당한 형, 그 끔직한 공간에 함께 있었던 동생 태석(정우성)은 심지어 살수를 대신해 살인누명까지 쓴 채 교도소에 수감된다.
복수를 꿈꾸는 이에게 변화는 피할 수 없는 일이다. 태석은 이기기 위해 피 흘리며 싸우는 방법을 배우고, 쉼 없이 바둑을 둔다. 히어로가 되기 위한 준비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세상에 나온 그는 자신과 함께 할 사람들을 모으고, 그들과 함께 복수를 준비하고, 하나 둘 실행해 나간다. 손이 잘린 허목수(안길강), 앞을 못 보는 주님(안성기), 죽은 태석의 형과 함께 했었던 꽁수(김인권), 이들의 공통점은 내기바둑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 그러하기에 태석의 조력자가 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그들 역시 태석을 앞세워 자신들이 이루지 못한 복수를 구현해야만 하기에.
계단을 밟아나가듯 살수의 팀원들을 하나씩 처단해나가기 시작하는 태석에게 행운의 여신은 마치 그의 편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살수와 주님의 내기바둑은 신이 태석을 외면해버린 듯 주님의 목숨을 앗아간다. 애초에 내기바둑판에서 정당함을 기대한다는 것이 얼마나 바보스러운 일인가. 살수는 어린아이 량량(안서현)과 배꼽(이시영)의 실력으로 승자가 된 후 무참히 주님의 손에 칼을 꽂는다. 마침내 태석과 살수의 최후의 대결, 목숨을 담보로 한 내기에서 무승부란 있을 수 없다. 그들의 싸움은 바둑판을 넘어 선혈이 낭자한 핏빛 대결로 변하고 마침내 살수의 손에 칼이 꽂힘으로서 승리의 여신은 태석에게로 향한다.
결국 바둑판에서 기대했던 '신의 한 수'는 영화의 마지막까지도 허락되지 않는다.
“망가진 삶을 역전 시킬 수 있는... 우리 인생에도 '신의 한수'가 있을까?”
후회와 한(恨)으로 얼룩진 주님의 질문에 그 자신은 이미 스스로 정답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삶에 '신의 한수'가 있냐?... 없다....하루하루 묵묵히 사는 게 우리가 사는 최선의 수지”
모든 걸 체념한 듯 내뱉는 허목수의 이 대사는 영화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이다.
영화는 익스트림 클로즈업을 자주 사용함으로써 긴박감을 유발시킨다. 또 미장센(감독의 연출 전반을 의미하는 매우 광범위한 영화 용어로 여기에서는 시각적인 스타일에 국한시키고자 한다.) 중 의상은 바둑의 검은 돌과 흰 돌을 나타내듯 살수는 검은 정장을, 태석은 올 화이트 컬러의 옷을 입음으로서 이 둘의 모습이 내기 바둑판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간군상임을 상징한다. 승자가 되기 위한 태석의 몸부림은 그의 흰 옷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선명한 핏빛으로 대신한다. 배꼽이 운영하는 술집의 바둑판 역시 상징성을 갖고 있는 도구 중 하나이다. 한 쪽에는 승리의 여신이, 다른 한 쪽에는 파멸의 신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는 묘수가 난무하는 내기바둑판의 생리를 그대로 형상화한 것이다. 살수의 승리인 듯 보였던 바둑판은 무승부를 넘어 그의 파멸을 야기시킨다. 내기바둑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주님 역시 승리를 기대했던 그 곳에서 죽음이라는 최대의 파멸을 맞이하고 말았다.
내기바둑판은 승자와 패자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거대한 인생의 축소판 역할을 한다. 어디로 가야 이길 수 있을지 정해지지 않은 바둑돌들은 삶에서 '신의 한 수'를 기다리고 있는 연약한 우리의 모습이다.
마지막에 태석의 승리가 좀 더 허무한 색채로 그려졌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클로징 시퀀스에서 죽은 줄로만 알았던 배꼽과 꽁수의 등장은 선악 구도의 뻔한 결말이라서 진부하다. 할 일이 많은 히어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엔딩은 불필요한 부연설명 같다. 하지만 이 영화가 그래도 좋은 것은 액션영화 장르 특유의 스트레스 해소용이라는 용도를 넘어서 하나의 의미 전달을 위해 애썼다는 점이다. 그래서 자꾸만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
영화가 보여주는 '신의 한 수'는 그렇게 거창한 것도,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주님의 '신의 한 수'는 내기바둑을 두기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평범한 일상, 그것에 감사하며 묵묵히 살아가는 것이 '신의 한 수'라는 사실을 바둑판에서 묘수를 기대했던 그들은 많은 희생을 겪은 후에야 깨닫게 된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매일매일 '신의 한 수'를 경험하며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주 가끔 꿈꾸는 특별한 그 무엇, 하지만 그런 것이 없어도 괜찮다.
아무 일 없이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신이 내게 선물해준 '신의 한 수', 바로 그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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