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술 좋아하시나요?
영화 ‘낮술’은 노영석 감독이 혼자 강원도 여행을 하던 중 떠오른 생각이 소재가 됐습니다. 실제 영화 속에서 나오는 팬션의 빈 방에서 골똘히 시나리오를 구상하던 노 감독은 ‘만약 옆방에 예쁜 여자가 머문다면 말을 걸고 싶지 않을까?’ '버스 정류장에서 모르는 여자가 술 한 잔 사달라고 하면 어떤 기분일까?' 하는 호기심에서 줄거리의 단서를 얻었다고 합니다. 이런 상상으로 영화를 만들면 재밌겠다고 생각한 작품이 바로 ‘낮술’입니다. 영화 '낮술'은 나 홀로 여행이 갖는 남자들의 로망과 판타지를 쫓습니다. 결국엔 참담한 현실에 좌절함을 알면서도.
여자 친구한테 채인 날, 우리의 주인공 혁진은 친구들로부터 위로의 술자리를 받습니다. 점점 취기가 오른 친구들은 좀 더 확실하고 화끈한 방법으로 혁진을 위로 하고자 돌연 강원도 정선 여행을 제안합니다. 개밥을 줘야 한다며 결심을 못하는 혁진을 무안하게 만들면서까지.
다음 날 터미널에 도착한 친구는 우리의 소심한 주인공 혁진뿐. 다른 친구들은 술에 뻗었는지 약속 자체를 잊었는지 코빼기도 볼 수 없습니다. 여행 출발부터 어긋난 혁진의 나 홀로 정선 나들이가 영화 ‘낮술’의 기본 줄거리입니다. 술 먹고 취해서 약속같은 것 하지마시길!!
여행지 정선에 도착한 혁진은 아무도 없는 터미널에서 덜덜 떨면서 정선장이 열린다던 친구 기상의 말을 떠올립니다. 정선장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정선장은 끝난지 오래, 혁진은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식당에 들어가 친구들과 통화합니다. 친구 세 명 모두 술에 취해 집에서 자고 있다는 말에 화가 난 혁진은 소주 1병을 시켜 마십니다. 마수걸이 낮술, 첫 잔입니다.
친구가 소개한 펜션에 도착한 혁진은 예쁘게 생긴 옆방녀를 보고 가슴이 벌렁벌렁, 싱숭생숭 해집니다.
겨울 경포대 바다를 바라보며 컵라면에 소주만큼 멋지고 맛있는 경험이 없다던 친구말대로 찾아간 바다에서 옆방녀 커플과 2차, 3차 밤술까지 이어집니다.
과연 혼자 여행하는 혁진의 강원도 정선 로맨스는 이루어질까요?
2010년 ‘낮술’이 개봉하고 1년 뒤쯤 노영석 감독과 영화평론가 김영진씨가 참석하는 <관객과의 대화>(CGV압구정 ‘무비콜라주 시네마 톡’ 행사)란 걸 하게 됩니다. 한 관객이 ‘낮술’을 홍상수 감독의 영화와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노영석 감독은 “홍상수 감독을 개인적으로 좋아하지만 솔직히 영화를 많이 보진 못했다”며 “마지막으로 본 게 ‘생활의 발견(2002)’인데 그 코드가 재밌어 그런 걸로 영화를 만들어도 재밌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것이 영화에 녹아들었던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노 감독은 그러나 “약간 다른 점이 있다면 홍상수의 영화에선 남자의 욕망이 해결되지만 ‘낮술’에선 전혀 해결해주고 싶지 않았다”며 “계속 틀어지게 해 웃음을 유발하고 싶었다”고 설명했습니다.
김영진 평론가는 “홍상수 감독과는 평소 실제 생활을 관찰해 영화를 만든다는 점에서 비슷한 유형의 예술가로 볼 순 있지만 스타일은 전혀 다른 것 같다”며 노 감독은 “일상에서 다른 그림자를 보는 재능이 훌륭한 것 같다”고 평가했습니다.
사실 독립영화는 다소 불완전한, 실험적인 성격이 강합니다. 저예산 영화의 매력은 표면이 매끄럽고 늘씬한 찻잔이나 주전자가 아니라 거칠고 투박한, 그래서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질그릇, 막사발 같은 맛이 납니다. 어색한 연기나 편집의 엉성함마저도 그만큼 참신하고 색다르게 다가옵니다.
혁진에게 길을 알려주던 버스 기사나 길에 호랑이가 나올지 모른다고 당부하던 슈퍼 할머니 등은 정선 현장에서 바로 섭외한 듯합니다. 연기라고는 처음 해보는 단역배우들의 어색한 연기는 독립영화만이 가질 수 있는 생명력입니다. 어색하고 억양 없는 대사는 손발이 저리도록 오그라들지만 나름대로 날 것 그대로의 웃음을 선사합니다.
촬영을 앞두고 주인공을 캐스팅하지 못해 급하게 인터넷으로 송삼동(주인공 혁진)씨와 육상엽(혁진 친구 기상)씨를 캐스팅했다는 노영석 감독은 술 마시고 주사가 있는지 만나자마자 술을 함께 마셨답니다. 혁진의 두 번째 여인 란희 역은 조연출(이란희)이 맡기도 했습니다.
술김에 약속한 친구들 간의 정선 여행, 출발부터 꼬인 혁진의 정선 나들이는 오해와 불통으로 인한 어긋남의 연속입니다. 혼자 여행하는 사람들의 로망은 제각각이지만 남자라면 또 무언가 짜릿한 경험도 꿈꿉니다. 비슷한 상황은 오지만 결과는 냉혹한 현실입니다. 낯선 여자와 황홀한 하룻밤의 로맨스와 좌절, 버스에서 만난 엉뚱한 여인과 목숨을 구해준 은인에서 돌변한 트럭 기사까지, 영화는 일상에서 일어날 것만 같은 일이지만 또 한편으론 전혀 생소한 체험들입니다. 에피소드, 경험의 과잉이지만 독립영화의 카메라 앵글은 담담하게 쫓아가며 사실감을 강조합니다.
총 제작비 고작 1000만 원, 13일 동안 10회 촬영, 돈 대신 강원도 여행과 술을 무한정으로 준다는 이야기에 따라나선 스태프는 모두 한겨레 영화연출학교 동기들이랍니다. 노영석 감독은 연출, 각본은 물론 음악, 미술, 편집에 횟집 주인 목소리 출연까지 여러 가지 역할을 몽땅 소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000만원으로 115분짜리 영화 한 편을 완성하기 위한 피나는 노력이지요. 수십억 원의 제작비를 들여서 만든 영화도 아닌데, ‘낮술’은 정말 기발하고 유쾌합니다. 술로 시작해서 술로 끝나는... 술의, 술에 의한, 술을 위한, 그런 영화입니다.
낮술에 취하면 애비 애미도 알아보지 못한다는 말도 있지만 그건 밤술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디로 가세요? 전 강릉 가는데...”
두 번째 여자인 란희를 처음 만났던 터미널에서 서울행 버스를 기다리던 혁진은 세 번째 여자인 그녀의 한마디에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면서 영화는 끝나게 됩니다. 관객도 함께 고민하는 장면입니다. 특히 남자 관객들은 ... 지금 내 상태, 내 기분도 완전 찝찝해서 얼른 집에 가고 싶어 죽겠는데... 강릉은 방금 갔다 오는 길인데...
혁진과 관객은 느닷없는 청순녀의 한마디에 정말 심각하게 고민을 합니다. 감독의 센스가 돋보이는 한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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