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가 차려주는 산 자들의 ‘잔치’-학생부군신위

서 기찬 / 기사승인 : 2014-04-14 18:3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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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가 차려주는 산 자들의 ‘잔치’ - 학생부군신위(學生府君神位, 1996, 감독: 박철수)

학생부군신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완도 무선국에서 걸려온 시외전화를 받고 허둥지둥 새벽길을 나선다. 새벽 겨울바다 바람의 잡음(雜音)과 계음(計音)이 짬뽕이 된 수화기 속에 하라부지가, 윙윙, 하라부지가 도라갸셔께, 윙윙, 느그 미국 성님한테, 윙윙, 전화하고, 윙윙, 빨리
택시로 강남 터미널까지
고속버스로 광주까지
직행버스로 해남까지
통통배로 전라남도 완도군에 부속된 섬까지 갈수록 길은 점점 좌우가 오므라들고 상하가 험했다. 상류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상가는 잔칫집이었다. 일흔 가호 앞뒤 섬사람들이 일당육칠(一 當六七)의 전식구(全食口)를 몰고 와 4박5일 장(葬)을 지냈다. 에미들이 따라온 새끼들에게 입이 찢어지든 말든 한 볼때기씩 고깃점을 밀어 넣어 주면 아이들은 뭔갈 움켜지고 뒤안으로 게처럼 잽싸게 빠져나간다. 사내들은 천막 밑으로 들어와, 가신 그 양반, 복인(福人)이셔 복인, 한마디씩 거들고 앉는다. (이하 중략)

황지우의 시 ‘여정(旅程)’의 앞부분입니다. 영화 ‘학생부군신위’의 모티브가 된 작품입니다. 박철수 감독은 실제로 부친상(영화 개봉 3년 전인 1993년)을 치르면서 경험했던 장례 문화의 일상과 상가에서 벌어지는 온갖 에피소드를 실감나게 보여줍니다.
“일상적 삶을 소재로 한 작품 연출은 1975년 영화를 시작하면서 늘 생각해 왔지만 영화 환경, 관객 성향 등과 맞지 않아 미뤄왔습니다. ‘학생부군신위’의 경우 보다 많은 인생 경험을 갖고 죽음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난 뒤 연출하게 돼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철수 감독은 자신이 직접 영화감독인 큰아들로 출연, 카메라를 들이밀고 현실과 작품 사이를 오가며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넘나듭니다. 마지막 장면에선 “컷”을 외치며 배우들에게 “수고 했어요”라고 응원합니다.
경남 합천군 가회면의 어느 시골 노인 박 씨의 갑작스런 죽음을 통하여 죽은 자의 삶과 인간관계를 조명하고 죽은 자를 보내는 살아있는 자들의 의식을 그리고 있습니다. 박 씨 노인의 죽음은 조용하고 특별한 일이라고는 없는 시골마을의 큰 행사가 됩니다. 호상(護喪; 장례를 주관하는 사람)이 정해지고 영화감독인 큰아들, 미국에 있는 셋째 아들, 카페를 경영하는 딸이 연락을 받고 차례차례 상가로 모여듭니다.
가족들과 친척들은 곡을 하고 생전의 모습을 회고하며 슬픔에 젖지만 장례를 도와주는 마을사람들에게 상가는 마치 잔칫집 분위기입니다. 방송으로 부음을 알리고 돼지를 잡고 트럭으로 수 십 박스의 술과 음식이 배달됩니다. 떠들썩한 상가의 요란스런 풍경은 슬픔과 기쁨이 교차하는 묘한 블랙코미디입니다. 죽음이 소재지만 유쾌하고 재밌습니다.

학생부군신위

“내 죽으니 그리 좋나!”
영화 포스터에 한 줄 카피가 시끌벅적한 상가의 분위기를 대변합니다. 돼지를 잡는 동네 청년들은 소주를 마시고 즉석에서 돼지 내장을 먹으며 농담을 하고 보험외판원인 작은 고모는 동네 어르신들을 상대로 영업을 합니다. 음식 장만을 도와주던 아주머니들은 연속극 시간에 일제히 TV앞에 몰려들고 민방위훈련 사이렌 소리에 상가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이 대피를 합니다. 그러다 상가에서 술 마시던 민방위 대장이 “상가는 치외법권 지역”이란 한마디에 모두 나와 하던 일을 계속 하지요.
고인이 밖에서 낳은 배다른 아이 바우는 상가가 즐거운 놀이터입니다. 어른들의 술자리를 흉내 내고 도시에서 온 친척 소녀가 화장실을 가자 몰래 훔쳐보기도 합니다. 고인이 즐겨 가던 다방의 마담과 아가씨들은 커피를 들고 조문을 와 문상객들에게 커피 서비스를 하더니 밤에는 고인이 즐겨 부르던 노래까지 하며 한바탕 공연을 펼칩니다.
감독은 이런 한 판의 소동 속에서도 친절하게 까다롭고 어려운 우리 고유의 장례 의식과 절차를 설명해줍니다. 전통 장례 문화의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거기에서도 유머는 빛을 발합니다. 전통적인 방식의 장례 의식은 현대적인 방식과 갈등을 빚게 마련입니다. 마음이 중요하다며 곡을 하지 않는 맏며느리, 찬송가를 부르는 셋째 아들, 수입 바나나를 올리느냐 마느냐 논란 등....

영화는 10여 일 동안 단숨에 찍었다고 합니다. 박철수 감독 특유의 생동감 넘치는 ‘들고 찍기’로 자유분방하게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영화의 무대가 되는 합천군 가회면 주민들도 적극적인 협조가 있었습니다. 250여 명의 대규모 문상객과 2,000여 개의 술병과 돼지 3마리가 동원되었습니다.

‘학생부군신위(學生府君神位)’란 벼슬을 하지 못하고 죽은 사람의 명정에 쓰이는 말 입니다.영화는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자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의미”임을 보여줍니다. 첫 장면에서 산모의 출산 장면이 나옵니다. 노인이 낮잠을 자면서 꾼 꿈입니다. 함께 사는 둘째 며느리의 출산을 미리 본 것이지요. 보통 한 집에서 출생과 죽음은 비슷한 시기에 옵니다.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이 늘 있는 일이긴 하지만 한 집안에서 누군가 죽음을 맞이하면 꼭 얼마 후엔 누군가가 태어납니다. 영화는 죽은 자를 통해 산 자의 ‘죽음을 다루는 의식’을 보여 주지만 살아있는 자들의 희망과 화해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죽은 자는 세상과의 이별이라 살아있는 자의 슬픔과 고통을 수반하지만 죽은 자와 관계된 모든 살아있는 자들의 만남을 제공합니다. 그리고 죽은 자의 마지막 길을 외롭지 않게 도와줍니다. 그래서 죽은 자와 산자가 벌이는 한 판의 장례는 잔치로 승화됩니다.
원로배우 최성(박 씨 노인 역), 문정숙(노인의 아내), 권성덕(호상)의 깊이 있는 연기가 작품의 리얼리티를 더하며 둘째 며느리로 나온 방은진, 노인의 배다른 동생 김일우의 연기도 인상적입니다.

학생부군신위

작품은 1996년 제32회 백상예술대상에서 영화부문 대상, 작품상, 감독상(박철수)을, 1996년 제34회 대종상에선 남우조연상(김일우), 시나리오상(김상수, 김상학)을 수상했습니다. 박철수 감독은 1978년 ‘골목대장’으로 데뷔해 ‘안개기둥(1986년)’ ‘접시꽃 당신(1988년)’ 등 다소 상업성이 짙은 영화를 만들다가 1990년 대 중반 제작사를 차리면서 작가주의로 방향전환을 합니다.
이 시기에 만든 ‘학생부군신위’는 박철수 감독의 색깔을 가장 잘 표현한 작품 중의 하나입니다. 다른 작품으로는 음식을 매개로 여성의 고독을 다룬 ‘301, 302(1995)’, 생명의 탄생과 낙태 문제를 다룬 ‘산부인과(1997)’, 재일동포 작가 유미리의 원작으로 가족의 문제를 그린 ‘가족시네마(1998)’ 등이 있습니다.
박철수 감독은 2013년 2월 어느 날 새벽, 일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음주운전 차량에 치여 현장에서 세상과 하직했습니다. ‘죽음’을 소재로 만든 이 작품을 다시 보면서 고인의 명복을 새삼 빌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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