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패왕별희(覇王別姬, Farewell My Concubine, 1993, 감독: 천 카이거)
문화대혁명의 격랑이 다소 주춤해진 1976년.
썰렁한 경극장을 함께 걸어가는 데이(장국영)과 살로(장풍의)는 패왕별희의 마지막 공연을 앞두고 있습니다. 마지막까지 우희와 항우를 연기했던 두 사람의 운명은 결국, 항우와 우희의 운명과 같이 하게 됩니다. 데이는 경극 무대의 완성을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2003년 4월1일 거짓말같이 배우 장국영이 몸을 던진 것처럼...
1993년 영화 ‘패왕별희’가 칸 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했습니다. 그 해 우리 영화 ‘서편제(1993, 감독: 임권택)’도 칸 국제영화제에 출품되었으나 아깝게도 예선에서 탈락하였습니다.
평론가들은 우리의 민족적인 판소리와 한(限)이 세계인이 함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을 얻지 못했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덧붙여 영화계는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며 세계 영화제에서 어깨를 겨누려는, 또는 세계 영화시장에 뛰어들려는 한국 영화인 모두가 한번쯤 생각해봐야 할 점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경극 ‘패왕별희’는 1918년 <초한의 싸움>이란 제목으로 처음 무대에 올랐습니다. 초(楚)의 패왕 항우는 우희와 여러 장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한군(漢軍)에서 투항해 온 이좌거의 권고로 출병하지만 이것은 한의 군사(軍師) 한신(韓信)의 모략이었습니다. 유인된 항우의 초군은 복병에 의하여 해하(垓下)에서 포위되어 사면(四面)에서 초가(楚歌)를 듣게 됩니다. 항우는 “초나라는 이미 망한 것인가.”라고 애마(愛馬)를 어루만지며 장탄식하고, 우미인은 작별의 시간이 왔을 때 칼을 들고 춤을 추다 자진(自盡)합니다. 혼자 탈출한 항우도 오강(烏江)에서 자결하고 말지요.
경극은 중국의 대표적인 전통 연극으로 우리의 판소리, 일본의 가부키처럼 동양 연극의 값진 보물이 되었습니다. 경극의 대표적인 소재로 사랑받는 ‘패왕별희’는 홍콩 출신의 소설가 릴리언 리에 의해 소설(‘사랑이여 안녕’)로 쓰여졌습니다. 이 소설을 릴리언 리와 루 웨이가 각색하고 ‘황토지(1984)’로 중국 현대영화의 새 장을 연 천 가이거(陳凱歌) 감독이 영상으로 옮긴 것이 영화 ‘패왕별희’입니다.
릴리언 리는 경극의 두 스타 살로와 데이의 동성애적 우정, 그리고 그 사이에 낀 주산(공리)과의 사랑을 중국 현대사의 격변기 속에서 훑어가며 예술과 인간 그리고 중국 역사를 살펴봅니다. 1924년의 군벌시대부터 문화혁명이 끝날 무렵인1977년까지...
중국의 치부를 드러낸 이 소설과 영화는 한때 중국에서 판매, 상영 금지되기도 하였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데이, 살로, 주산은 중화민국시대, 항일 전쟁시대, 중국 내전시대, 중화인민공화국시대, 토지 개혁운동, 반우파운동, 문화혁명운동, 그리고 개혁개방운동의 시대를 거칩니다. 어린 시절 매를 맞으며 혹독한 훈련을 거친 뒤 중국의 민중 연극으로서 경극의 명성을 잇는 두 남자의 사랑, 우정을 현란한 영상 속에 수놓습니다. 굴곡 많은 중국사 속에서 남녀 양성의 사랑을 간직하는 주인공 데이가 끝내 경극과 우정의 순수함을 지키려 자살하는 끝마무리는 비장하기까지 합니다.
‘패왕별희’가 중국 대중에게 오랫동안 사랑받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중국 옛 역사의 초 패왕과 그에게 죽음으로 사랑을 받던 우희의 절개가 무엇보다 크게 작용합니다. 우리나라의 ‘춘향전’처럼 말입니다. 역시 절개와 지조, 그리고 충절이 무엇보다 동양인에게 으뜸되는 미덕으로 꼽히는 것은 당연한 것 같습니다.
특히 이런 충절과 애정을 주축으로 한 패왕과 우희의 옛 사랑의 패턴을 실생활에 있어 살로와 데이, 두 스타의 우정 혹은 동성애적인 관계 속에 현대적으로 옮겨 허구로 만든 것은 원작자 릴리언 리의 놀랄만한 상상력과 창의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천 가이거는 원작을 이미지로 옮기면서 그 재미와 경극의 독특한 매력을 잘 표현했습니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평범한 진리로 세계적인 이목과 평가를 얻은 셈이지요.
천가이거 감독은 1952년 베이징 출생으로 중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중국 제5세대 감독으로 불립니다. 보통 제5세대 감독이라면 문화혁명 때 젊은 시절을 보냈던 인물들로 새로운 이념과 개혁개방의 물결을 온몸으로 체득해 중국의 근현대사 희로애락을 가감없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천 감독의 다른 작품 ‘황토지(黃土地, Yellow Earth, 1984)’ ‘현 위의 인생(邊走邊唱, Life On The String, 1991)’도 강력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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