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금광시대(La quimera del oro, The Gold Rush, 1925, 감독: 찰리 채플린)'
찰리는 지독한 굶주림 때문에 구두를 삶아 먹으며 구두창의 못을 뼈다귀처럼 핥고 찰리의 상대편에 있는 사람은 찰리를 닭으로 착각하고 덤빕니다. 금광을 발견한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싸우지만 현실의 눈사태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찰리는 어느 오두막에 들어가 고달픈 육신을 달래지만 이제 그에게는 이성에 대한 그리움이 몰려옵니다. 어디에도 희망은 없고 현실은 언제나 초라했으며 욕망은 항상 아귀처럼 달려듭니다. 그래서 찰리로 나온 채플린은 웃음으로, 엉뚱한 댄스 스텝으로, 초라함과 낭만이 가득찬 풍경으로 그것에 대항했습니다.하지만 영화의 결말은 채플린이 금광을 발견한 사람의 동료가 되고 게다가 아름다운 술집 무용수를 품에 안고 행복한 웃음으로 키스를 나누려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원래는 우수와 비애로 가득한 사회비판적 영화였는데 채플린 역시 할리우드 사람답게 할리우드의 고색창연한 행복한 결말의 관습을 이어받았습니다. 상업주의와 타협한 셈이지요.
영화 '황금광시대'는 비극과 희극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채플린의 믿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채플린은 1896년부터 1898년 사이에 클론다이크에 황금을 찾으러 몰려간 시굴자들의 궁핍한 생활을 담은 입체경 슬라이드를 보고, 또 1846년에 시에라 네바다에서 폭설에 갇혀 자신들의 모카신과 죽은 동료의 시신을 먹어야 했던 이민자들인 도너 무리의 참사에 관한 책을 읽다가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황금광시대'는 1925년 당시에도 흥행에 크게 성공했고 지금도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영화입니다. '시티라이트(1931)'가 자본주의가 이미 자리를 잡은 도시의 쓸쓸한 풍경이자 돈과 인격에 관한 수채화라면 '황금광시대'는 황금을 쫓아 부나방처럼 헤매는 인간들을 그린 한 장의 흑백사진입니다. '모던타임스(1936)'가 자본과 권력에 대한 비판의 시작이라면 '황금광시대'는 공격을 위한 가벼운 몸풀기인셈이지요. 채플린의 5대 희극안에는 이 세 편외에 '위대한 독재자(1940)'와 '무슈 베르두(살인광 시대, 1947)'가 추가됩니다. 그리고 이 희극 5편은 채플린 최고의 영화들 속에 포함됩니다.
채플린은 삶과 사회에 대해 지극히 비관적이었던 대신에 그것을 묘사하는 무기로 웃음을 선택한 셈이었습니다. 물론 그가 웃음을 택했던 것은 불우했던 시절에 대한 회상을 거부했던 심리와 철벽같은 세상에 대한 전술이었겠지만 이 속에 상업주의적 타협이 없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밝은 화면과 또렷한 사물들, 그리고 사건 위주의 단순한 이야기 구조 등 그의 영화는 당시 할리우드의 모두가 그랬듯이 예술보다는 상품에 가까웠던 것입니다. 하지만 채플린의 영화들, 특히 '황금광시대'가 세상을 향해 내지른 질타는 사회비평적 모범으로서 이후의 영화에 끊임없이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러한 정신적인 부분과 더불어 우리는 어두운 도시를 배경으로 한 많은 현대영화에서 채플린 영화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찰리 채플린은 1889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1977년 88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그는 열두 살 때 극단의 아역배우를 시작으로 유리공, 이발사, 팬터마임 배우 등을 전전했습니다. 네 번의 결혼과 한 번의 약혼에서 열 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1910년 팬터마임 배우로 미국에 발을 디딘 뒤 40여 년간 미국에서 살다가 1947년 할리우드의 '빨갱이 사냥'에 걸려 1952년 추방당했습니다. 평생동안 그는 81편의 작품에 관여했는데 이 중 70여 편이 자신이 직접 감독과 주연을 겸했습니다.
채플린은 '시티라이트(1931)'에서 아름다운 서정으로 당시의 상황을 묘사한 뒤 '모던타임스(1936)'에 가서 구체적인 비판을 시작합니다. 이것은 '위대한 독재자(1940)'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짧은 콧수염의 히틀러와 찰리... 찰리는 꽉 죄는 윗도리와 헐렁한 바지, 그리고 군함만한 구두와 대나무 지팡이로 히틀러에 대항했습니다. 남들은 현재에 안주할만도 한 나이, 쉰 살 때의 일이었습니다.
이런 채플린이 두 번째 부인 리타 그레이와 몰래 결혼하고 무성영화 '황금광시대'를 만들 때, 한국에서는 나운규가 '아리랑(1926)'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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